3대0. 스코어만 보면 흔한 개막전 승리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양 팀을 통틀어 최고 평점을 받은 선수는 골을 넣은 공격수도, 도움을 기록한 미드필더도 아니었다. 이적한 지 닷새, 훈련은 겨우 두 차례 소화한 센터백 이한범이었다. 축구에서 중앙 수비수가 데뷔전에 팀 내 최고 평점을 받는 일 자체가 드물다. 실점을 막는 플레이는 대개 눈에 띄지 않고, 평가 지표도 공격 포인트에 유리하게 설계돼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왜 하필 이 경기, 그것도 이적하자마자 뛴 선수에게 이런 평가가 나왔을까.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이 이적을 둘러싼 상반된 두 개의 시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적응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
이한범의 브뤼헤행이 발표됐을 때 벨기에 현지 반응은 마냥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브뤼헤는 이한범을 영입하며 구단 역사상 수비수에게 지불한 금액 중 가장 큰 규모를 투자했다. 이적료는 1,050만 유로(약 171억 원) 수준으로, 다수 리그 우승 경력을 보유한 명문 구단이 수비 자원에게 쏟은 것치고는 이례적인 베팅이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이한범은 계약 마지막 시즌을 남긴 미트윌란을 떠나 곧바로 새 시즌 개막전에 투입돼야 하는 일정이었다. 새 리그, 새 팀, 새 전술 시스템에 적응할 시간은 사실상 훈련 이틀이 전부였다. 현지에서는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해 영입한 만큼 곧바로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월드컵에서의 활약만으로 실력을 담보하기엔 이르다는 신중론도 동시에 나왔다. 그리고 이 시선이 정면으로 시험대에 오른 경기가 바로 코르트레이크와의 개막전이었다.
평점이 아니라 '장면'을 봐야 하는 이유
경기 데이터만 나열하면 이한범의 활약은 이렇다. 패스 성공률 95%, 태클 3회, 골라인 클리어링 1회, 걷어내기 8회, 헤더 클리어 6회, 볼 리커버리 7회, 공중볼 경합 성공 12회. 숫자로는 안정적인 빌드업과 확실한 제공권을 갖춘 수비수라는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 경기를 상징하는 장면은 통계표 바깥에 있었다. 전반 5분, 골키퍼가 판단 미스로 골문을 비운 절체절명의 순간, 이한범이 슬라이딩 태클로 상대의 빈 골문 슈팅을 걷어내며 실점 위기를 넘겼다. 이런 상황은 연습으로 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위기가 아니다. 동료의 실수로 발생한 돌발 상황에서 얼마나 침착하게 판단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몸을 던지느냐는, 전술 이해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경기 감각의 영역이다. 훈련 이틀 만에 이 정도 판단력을 보여줬다는 것은, 단순히 '몸값이 비싼 만큼 잘한다'는 서사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가 가진 수비 감각이 특정 시스템이나 동료에 대한 익숙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이식 가능한 개인 역량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후반 23분, 전방 압박 상황에서 상대 공을 따내 두 번째 골(카를루스 포르브스 득점)의 시발점을 만든 장면도 있었다. 수비수가 실점을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공격 전개의 시작점 역할까지 했다는 건, 브뤼헤가 그를 단순한 '수비 보강' 이상의 자원으로 그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기 후 이한범 본인도 자신의 강점으로 공중볼 경합과 헤더, 발밑 기술을 꼽으며 센터백 파트너의 조언이 적응에 도움이 됐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개인 기량과 더불어 동료와의 빠른 호흡 형성이 이례적인 데뷔전을 뒷받침했음을 보여준다.
왜 하필 브뤼헤였나 - 이적의 구조를 읽는 법
이한범의 커리어를 시간순으로 늘어놓으면 꽤 전형적인 상승 곡선처럼 보인다. FC서울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한 뒤 2023년 덴마크 미트윌란으로 건너가 유럽 무대를 경험했고, 3시즌 동안 주전 경쟁을 뚫으며 팀의 핵심 수비수로 성장했다. 그런데 정작 흥미로운 지점은 계약 조건이다. 브뤼헤는 거액을 투자한 선수에게 흔히 장기 계약으로 안정성을 확보하려 하는데, 이한범과는 2029년까지 3년 계약을 맺었다. 선수 측에서 장기 계약보다 빠른 다음 단계 진출에 무게를 둔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브뤼헤 역시 이 그림에 동의한 셈이다. 실제로 브뤼헤는 최근 몇 년간 핵심 자원을 키운 뒤 거액의 이적료를 받고 5대 빅리그로 떠나보낸 전례가 여러 차례 있다. 이한범을 영입하며 브뤼헤가 그린 그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리그 우승 경쟁과 UEFA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함께 경험시키며 검증된 선수로 키운 뒤, 다음 단계로 도약시키는 경로다. 이는 김민재가 걸어온 길과도 겹친다. 김민재는 나폴리 이적 당시에도, 이후 바이에른 뮌헨행에서도 소속 구단 역대 수비수 이적료 최상위권을 기록하며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이한범이 브뤼헤에서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무대까지 경험하게 된다면, 이 비교는 단순한 기대 섞인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검증 가능한 궤적이 된다. 실제로 이한범 본인도 경기 후 UEFA 챔피언스리그 등 더 강한 상대를 앞두고 경기력을 끌어올리겠다는 뜻을 밝히며, 스스로도 이 구도를 의식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남은 변수: '증명'은 한 경기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개막전 한 경기의 평점이 시즌 전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지에서 제기됐던 우려, 즉 새로운 리그의 빠른 템포와 전술 시스템에 지속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이한범은 과거 짧은 부상 이력이 있었던 만큼, 시즌 전체를 소화할 수 있는 체력 관리와 꾸준한 출전 시간 확보가 다음 관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브뤼헤는 이번 시즌 리그 우승 방어와 함께 챔피언스리그 조별 라운드 이상의 성과를 노리는 팀이다. 이한범이 승격팀을 상대로 보여준 안정감을 유럽 대항전 상위권 팀들을 상대로도 재현할 수 있는지가, 그를 향한 빅리그의 관심이 실질적인 오퍼로 이어지느냐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데뷔전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한범은 거액의 이적료에 짓눌리지 않았고,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는 현실적 제약을 특유의 침착함으로 상쇄해냈다. 다음 관문은 한 경기의 임팩트가 아니라, 시즌 전체에 걸친 꾸준함이다. 그 꾸준함을 증명해낸다면, 이번 개막전의 평점 8.6은 우연한 이변이 아니라 상승 곡선의 첫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 *작성 근거: 2026년 8월 8일 벨기에 주필러 프로리그 개막전(클럽 브뤼헤 3-0 KV 코르트레이크) 및 이한범 이적 관련 국내외 보도(2026년 8월 초)를 바탕으로 작성.*